원풍가첩(院豐家牒)

김알지 이야기

신우림 2011. 4. 3. 16:43

김알지 이야기

60년(신라 탈해왕 4년) 8월4일 새벽에 어느 사람이 월성(경주)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밝은 빛이 계림(鷄林)에서 비치는 것이 보여 가서보니 소나무 높은 가지에 금빛 찬란한 금궤가 걸려있고 아래에서 흰 수닭이 울고 있었다. 그래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보니 어린 남자아이가 누어 있다가 곧 일어났다. 왕이 "하늘이 내리신 아들"이라며 아이의 이름을 어린아이라는 뜻의 알지(閼智)라고 하고 성을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이라고 했다. 왕이 좋은 날을 골라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김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김아도(阿都)를, 아도는 김수류(首留)를, 수류는 김욱부(郁部)를, 욱부는 김구도(俱道)를, 구도는 김미추(未鄒)를 낳았다. 알지의 7세손인 미추가 262년 신라 13대 미추왕에 올라서 신라의 김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신라는 총 56명의 왕중에 김씨가 38명이다.

대종인 경주 김씨는 조선시대까지 총 600여개의 본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약 270여개 본관만 남아있다.

이중에서 신라 29대 무열왕의 5세손인 김주원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아들인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이다

신무왕의 후손인 김영이를 시조로하는 영산.(영동)김이다

문성왕의 8세손 김선궁을 시조로 하는 선산(일선)김을 제외한 대부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경순왕(김알지의 28세손)은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한 뒤 왕위를 오르게 하였으나,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아 사심관(事審官)으로 여생을 보냈다. 경순왕의 9아들 중 첫째 아들 김일(鎰)과 김굉을 제외한 7아들은 낙랑공주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넷째 아들 김은열의 후손이 가장 번창했으며, 구안동(舊安東), 청풍(淸風), 김녕(金寧), 도강(道康), 전주(全州), 양근 (楊根), 영광(靈光), 안산(安山)김씨 등이 모두 은열의 후손인 것으로 전해지며, 이밖에 선산(善山), 의성 (義城), 언양(彦陽), 울산(蔚山), 나주(羅州), 상산(商山), 안로(安老), 연안(延安), 순천(順天), 고령(高靈), 풍산등이 알지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김알지계 김씨에서 다른 성으로 갈려간 성씨는 안동 權(권)씨 강릉 왕(王)씨 광산 이(李)씨. 감천 문(文)씨. 수성최씨 등이 있다.

 

<참 고>경순왕의 9아들

1남 김 일

첫째아들 金鎰(김일)은 昭元王后 박씨 소생으로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이를 통분히 여겨 금강산에 들어가서 움막을 짓고 산 마의태자를 가리키는데, 기록에 보면 그에게는 입산 전에 낳은 金較(김교)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마의태자 김일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 부령(부안)김씨, 부여김씨, 통천김씨

마의태자와 관련해서는 KBS 1TV 역사스페셜 홈페이지 중 [2000.4.15 신라최후의 미스테리, 마의태자]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고, 인제군청 홈페이지를 보면 김부대왕각 동제, 김부리와 군량리(軍糧里), 김부리의 옥새바위, 마의태자 유적지비, 김부 대왕각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남 김 굉

장남 김일과 함께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차남 金(김굉)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들어가자 자기도 머리를 깍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법명은 梵空(범공)이었으며 나중에 해인사에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이 범공이란 중이 마의태자의 막내아들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己未譜 같은 족보에 보면 범공은 둘째아들 김굉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고, 사가에 전하는 족보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굉은 중이 되기 전에 낳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의 이름은 金雲發(김운발)이고, 차남의 이름은 金雨發(김우발)이었다.

김굉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교하김씨, 나주김씨, 안로김씨, 해주김씨

 

3남 김명종

3남 金鳴鍾(김명종) 또한 소원왕후 박씨 소생이다. 각간을 역임했으며 시호은 永芬公(영분공)인데 뒤에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주김씨의 시조는 3남 김명종과 4남 김은열 두 명인데, 이처럼 경주김씨의 시조를 두명으로 한 것은 김명종이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데 반해, 김은열은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3남 김명종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강화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낙안김씨, ... <생략>

 

4남 김은열

4남 金殷說(김은열)은 왕씨 소생이다. 왕씨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를 가리킨다. 大安君에 봉해졌으며, 김명종과 함께 경주김씨의 시조로서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긴 사람이다.

김은열에게는 김태화, 김숙승, 김염(→김품언, 김심언)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서 나오는 손자들이 또 분파를 해나갔기 때문에 많은 성씨가 나오게 된다.

첫째아들 김태화는 김은열의 경주김씨를 이어받으나, 둘째아들 김숙승은 안동김씨(구안동)의 시조가 되며, 셋째아들 김염은 김해김씨(후김)의 시조가 되었다. 김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아들 김품언은 수원김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김심언은 영광김씨의 시조가 괴었다.

그런데 안동김씨에서 대구김씨, 사천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되며, 수원김씨에서는 용담김씨, 용성김씨, 인동김씨, 한남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된다.

김은열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를 소개하면 너무 많아 생략

5남 김 석

5남 金錫(김석)은 왕씨 소생이다. 김석은 金重錫이라고도 불리며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의성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석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개성김씨, 고령김씨, 광주김씨, 설성김씨, 의성김씨, 적성김씨

 

6남 김 건

6남 金鍵(김건) 역시 왕씨 소생이다. 강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강릉김씨에는 두 파가 있는데, 하나는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고, 다른 하나는 김건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다. 이 두파를 구분하기 위해 김건의 강릉김씨를 후강릉김씨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김건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강릉(후)김씨, 강서김씨, 청주김씨, 홍주김씨

 

7남 김 선

7남 金繕(김선) 역시 왕씨 소생이다. 언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언양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선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담양김씨, 언양김씨, 예천김씨

 

8남 김 추

8남 金錘(김추) 역시 왕씨 소생이다. 일선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선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일선은 선산의 옛 이름이다.

김추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경산김씨, 남원김씨, 삼척김씨, 선산(김추계)김씨, 영월김씨, 원주김씨, 진주 (신라)김씨, 춘양김씨, 희천김씨

 

9남 김덕지

9남 金德摯(김덕지)는 순흥안씨 소생이다. 학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뒤에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학성은 울산의 옛 이름이다.

김덕지 계열은 울산김씨 하나밖에 없다.

< 경순왕의 딸 >

월악산 국립공원내 미륵사지와 덕주사, 덕주산성, 덕주골 등지에는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과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산재해 있고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25-2에 있는 원주황산사지(原州黃山寺址)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존상을 산정 석벽에 조각케 하였고, 그후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존상을 보고 환경한 후부터 산명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귀한 분이 왔다하여 동리 이름을 귀래(貴來)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