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가첩(院豐家牒)

우리가문의 선조,..록선청백리 허백당(虛白堂) 공

신우림 2011. 4. 3. 17:04

우리가문의 선조

가. 록선청백리 허백당(虛白堂)

정해 1467(세조 13)∼을미 1535(중종 3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堂). 9대손인 진산군수공 휘 휘손(諱 徽孫.增吏曹參判)의 독자로 태어났다.

7세에 능히 문장을 지어 서거정(徐居正)에게 크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1489년(성종 20)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497년(연산군 3)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내직으로는 정승원 주서. 홍조참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외직으로는 영해부사 경주부유관 전라. 황해. 충청의 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04년 홍문관부수찬으로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호추존(廟號追尊)을 극력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예천에 정배되었으나 중종 반전으로 곧 풀려난 일도 있었다.

1519년 기묘사화 후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곧 첨지충주 부사를 거처7월 5일 홍문관부제학으로 옮긴 후 이때 다시 겨울에 전라감사로 완산(지금의 전주)에 부임 후 임기가 끝난 후 완산을 떠날 때 뒤따라온 망아지를 전라도 소유라 하고 떼어 동문 앞 버드나무에 메어놓고 돌아왔는데 완산 백성들이 그곳에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그 덕을 높이 기렸다고 한다.

중종20년 을유1525년 통정대부 홍문관부제학에서 경주 부윤으로 나갔다, 그후 중종 24년 기축1529년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황해도 관찰사로 해주에 부임하였다,

중종 26신묘(1531)년 가을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다시내직에 들어간 후 2년 뒤 충청감사로 나갔다. 성품이 파당을 싫어하고 꾸밈을 좋아하지 않았고, 학문에 밝아 이행· 정희량(鄭希良)· 권달수(權達手) 등과 교유가 깊었다.

그의 학문은 특히 역학·음양 및 복서(卜筮)에 통달하였다. 청백과 애민의 일념으로 인정을 베풀어 의를 실천하였다. 때로는 자신의 녹봉까지 털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니, 그 선정의 명성이 온 나라에 널리 소문으로 알려져 중종 임금때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고, 불천지위로 선허되여 지금의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1리 행갈에 묘소와 그 앞에 묘우, 재사를 지어 모시고 묘소의 동남쪽에 신도비를 세웠다.

또한 勿溪書院 (물계서원-예천군 감천면)에 배향 되었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國朝榜目. 〈崔完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