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미리는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이다..
풍산김씨 500년 세거지인 이동네는 김대현 선생의 아들 8형제가 모두 진사에 이르렀고
그중 다섯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자 인조 임금이 팔련오계(八蓮五桂)라 하여 오미동으로 지명을 하사한후
오미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오미동 참봉댁
중종때 이조참판을 거쳐 삼도방백을 지낸 청백리 허백당의 12대손인 학암 김중휴(1797~1863)선생이 분가할때 지은 가옥이라한다.
학암이 조산대부 제릉참봉을 지내 참봉댁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섯칸 솟을 대문이 집의 위용을 자랑한다.
마당이 어찌나 넓은지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에 밭이 있다.
마당 동편에는 새사랑채가 있으며 아마도 그옛날 여기서 글공부를 가르쳤을듯 하다.
서편에는 곳간이 초가로 서있고....
안채로 통하는 중문간의 문턱 곡선이 눈길을 끈다...
별달리 문이 달리지 않고 옆을 틔어 놓은것은 아마도 곡식을 싫은 달구지들이 드나 들었나보다...
솟을 대문을 통하지 않고 이 문으로 들어가는것이 나는 더 맘에 들었다..
안채는 들어가보지 않았다.
살림집으로 사람이 살고 있었으니 불쑥 들어서기 그러해서 바깥으로만 돌아봤다..
안채는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수 있는 ㅁ자형의 유형이다.
그리고 여러번 증축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수 있었다.
들어설때 옆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 솟을 대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풍산김씨 영감댁이 있다..
저 길 뒷편에서 갓을 쓴 선비가 곧 돌아나올듯한 분위기인데...
전봇대가 나의 환상을 깨워준다~
풍산김씨 영감댁
1759년(영조35)에 처음 새웠으나 1826년(순조26)에 증축된 가옥이다.
이집의 당호는 이집을 증축한 김중우(金重佑)공의 아들 김두흠(金斗欽) 선생이
통정대부 동부승지의 벼슬을 지낸데서 유래하였다 한다.
일반 사대부 가문의 ㅁ자형의 집이 아닌 복합적인 형태의 집이다.
집을 짓고 중수하고 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계자각 난간을 두르고 둥근기둥을 사용해 사대부의 위용을 잃지 않게 했다.
일각문 뒤로 사당이 있었다.
일각문 안 사당앞의 나무가 이 집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영감댁을 나와 오미동을 한바퀴 돌아봤다.
한 성씨가 오백년을 이어온 것은 그 정신이 분명했을 것이다.
오미동이란 이름에서도 알수있듯이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이가 많았고
근래에 와서는 애국지사가 또 이 동네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일본 궁성 정문에 폭탄을 던지고 옥에서 최후를 마친 김지섭 선생,
일본 총영사 10여명을 사살하고 자결한 김만수 선생,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자결한 김순흠 선생등
살신성인한 애국지사가 이 오미동에서 났다고한다.
이처럼 5백년 세거에 위세만 세운것이 아니라
진정한 선비의 정신을 올곧게 세웠다 할수 있을것이다..
오미동이 여전함이 이렇게 반가울수가 없다.
역사는 계속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는것인가 보다...
살림만 이어온것이 아니라 정신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오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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