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가첩(院豐家牒)

오록(梧麓)리

신우림 2011. 4. 3. 17:00

오록(梧麓)리

①.지명 유래

행정구역상: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록1리

태백산 줄기 노봉산(갈방산)을 진산으로 천석산이 좌청룡, 만석산이 우백호 형상 을 이룬 데 자리한 봉화군 물야면 오록1리 창마[倉村].

마을 우백호에 속한 봉황산. 상서로운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든다 해서 마을 이름을 오록(梧麓)이라 하고 곳곳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1700년대 구휼미 저장고가 생긴 후부터 창마로 불리고 있다.

이 마을은 풍산 김씨 시조인 문적의 18세 손으로 풍수지리에 밝았던 노봉 김 정(金政) 선생이 서벽 등을 둘러 본 뒤 숙종 22년(1696)에 터를 잡았다. 선생은 마을을 이룬 뒤 내청룡 빈곳 어귀에 터를 닦고 남은 돌로 석축을 쌓아 그 앞에 성황당을 짓고 서편에 짐대라는 장승을 세웠다. 노봉은 고조부인 유연당공의 자제중 둘째 망와 영조, 셋째 장암 창조, 여섯째 학 사 응조공의 자손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세거하였다.

이 마을 풍산김씨 문중에서는 조선말까지 과거 대·소과에 70여명의 인물이 배출 됐다. 특히 정조 철종 순조때에는 취헌 종태, 동소 중하, 오촌 규윤 등 세 사람이 참판으로 동시에 재직하여 세칭 옥당(玉堂)마을로 영남에 그 명성이 높았다. 이를 입증하듯 창마에는 마을 초입을 솟대거리로 부른다. 과거급제의 경사가 있을 때 마다 마을 어귀에 솟대를 세워 축하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곳과 마을안에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감나무 은행나무 등이 즐비하다.

지금도 물야초등학교에서 마을쪽으로 120m나 이어진 솔숲은 주민들의 자랑거리요 긍지다.

오록의 송림 얘기는 여럿 전해진다. 제주목사를 지낸 김정(金政)이 영조 12년 천석산 좌청룡의 꼬리가 짧아 이를 부수키 위해 제주서 가져와 뿌린 솔씨가 자란 것이라는 설이 있다. 또 김정이 제주에 사천서당을 세우고 화북포구를 축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다 그곳 에서 영면하자 주민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고향에 솔씨를 보내 일궜다는 구전도 있다. 이 송림은 이렇듯이 제주와 인연을 맺은 지 260년이 지난 지금도 양 지역을 연결 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996년 12월 제주도 문태수 정무부지사를 비롯한 제주도민과 노봉의 후손들 이 창마에 노봉 추모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갖는 등 옛 연을 근세에도 끈끈히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창마에서는 마을 단위로는 드물게 망와 학사 노봉선생을 불천위 제사로 모신다. 장암정(만축정)과 노봉정사, 화수정사 등과 고색창연한 20여채의 기와집들이 사람 키 높이의 돌담장과 어우러져 지난 풍상을 대변이라도 하듯 마을을 지켜서 있다. 도 지정문화재자료 제150호인 藏庵亭(장암정)이 있다.

현재는 마을전체가 전통문화 체험마을로 지정

 

②. 세거 내력

11세 허백당(휘 양진, 공조팜판/청백리)선조의 증손인 14세 유연당(휘 대현, 증 이조참판) 공의 현손 18세 노봉(휘 정, 제주목사)공은 이곳 오록리의 입향조로서, 특히 풍수지리설에 밝아 서벽 등 여러곳을 둘러본 후, 숙종 22 병자(1696)년 음력 11월 이곳을 길지로 세거의 터전을 잡았다.

이곳은 원래 다른 두 성씨(안동권씨, 의령여씨)가 얼마동안 살고 있었으나, 우리풍산김씨가 세거한 후부터 점차 우리김씨 일족만의 동리로 변했다.

노봉공은 중형(휘 개, 동추)과 함께 가난과 싸우면서 마을에서 3리쯤 떨어진 신담에 움막을 짓고 이 터를 닦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집을 짓고 동네를 이루면서 마을 중간을 흐르던 물길을 서편으로 돌렸다. 그 내청룡의 빈곳 어귀에 터를 닦고 남은 돌로 석축을 쌓아 그 앞에 성황당을 짓고 서편에는 짐대를 세웠다.

그 후 공의 고조부 14세 유연당공의 자제 9형제중 둘째 자제 망와(휘 영조, 이조참판)공 과 셋째 자제 장암(휘 창조, 도사)공, 그리고 여섯째 자제 학사(휘 응조, 우윤)공의 자손 (촌수로 8촌 이내)이 모여 한마을을 이루고 세거하여 오늘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