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당(悠然堂) 휘 대현(諱 大賢)
자는 희지이고 호는 유연당이며 公은 화남공의 맡 자제로서. 선조15 임오(1582)년 생원시에 합격 문과에 올라 산음현감으로 있다가
중년에 고향 오미동에서 영주 봉향리로 이주한 후 선조 기축(1589)년 조금 서쪽으로 두 거북바위가 서로 가까이 보이는 곳에 거처를 꾸미고 자호(自號)를 죽암에서 유연당(悠然堂)이라 개호하고 현판을 걸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 사람들을 모아 안집사(按執使)였던 백암(柏巖) 김륵(金玏)의 밑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했다. 1595년(선조 28) 성현도(지금의 경북 경산과 청도사이)의 찰방에 부임하였다.
부임 후 전쟁 뒤 온갖 폐해가 난무하는 것을 보고 조정에 보고를 올려 바로 잡았다. 임기를 마치고 이임한 뒤 성현도 찰방의 이졸(吏卒)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공을 기렸다고 전한다.
그 뒤 1601년(선조 34) 산음(현재의 경남 산청) 현감으로 다시 부임하여 전쟁으로 황폐해진 향교를 녹봉을 털어 중건하여 학문의 기풍을 진작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차탄리라는 곳에 향교를 새로 지어 준공하던 날 지역의 7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대하여 양로연을 베풀었고, 부득이 불참한 사람에게는 지팡이와 쌀과 고기를 보내 위로하였다. 친구 중에 나병 환자가 있어 다들 접촉하기를 싫어하였으나, 그는 "병은 죄가 아니고 마음의 병보다 깨끗하다."고 하며 끝까지 우정을 잊지 않았다. 임진란이 끝난 후 기민 구제에 전력을 쏟았다.
자제 8형제분 중 5형제분이 문과에 급제하니 구조고전에 의하여 가선대부 이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
향도사림의 공의에서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선허 되어 종택 가묘에 봉향되었다. 그리고 자제 팔형제분과 함께 추원사에 九位同堂으로 주향(主享)되였으며 또 영주 鷗湖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유연당집 2권이 있다.
앞으로는 높지 않은 산들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 풍광이 유연당의 삶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망동「유연당」도지정문화재로 지정 |
|
[2008-03-25 오전 1:23:00] |
|
|
|
영주시 하망동 288-2번지에 있는「유연당」이 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3월24일자로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534호로 지정고시 하였다.
유연당은 悠然堂 金大賢(1553~1602)이 1589년(선조 22) 그의 외가가 있던 奉香里(휴천동)에 건립했다. 그 후 沙禮(현 하망 1동)로 옮겨 후손들이 관리해오다가 1900년경에 지금의 元塘(현 하망 2동)으로 건물을 그대로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유연당은 口자형의 정면을 이루고 있는 중문간 및 사랑채가 좌우로 각기 1칸과 2칸씩 돌출해 길게 놓여 있고 그 뒤편에 ㄇ형 안채가 안마당을 에워싸고 있는 등 19세기 후반의 구조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안채의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다.
유연당은 山城(현 영주중앙의 구성공원)의 남쪽을 대표하는 고택으로 동쪽의 삼판서고택(현 복원 중)과 서쪽의 백암고택(현 철거되고 없음)과 함께 이곳의 3대 고택 중 하나로, 김대현이 거주하면서 전란극복에 기여함과 동시에 ‘八蓮五桂’(8명의 자제 모두가 소과(생원․진사)에 합격하고, 그 중 5명이 대과(문과)에 급제함을 말함)를 배출해낸 지역 역사문화의 상징적 의미가 큰 건물로 명성이 높다. 또한, 유연당에는 다수의 고서자료뿐만 아니라, 「세전서화첩 世傳書畵帖」 「청참보우일기請斬普雨日記」 「회재퇴계양현변무소晦齋退溪兩賢辨誣疏」 「병호보합전말屛虎保合顚末」 등의 미공개 주요자료를 비롯해 12,000여 점에 이르는 고문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 지정세부내역
명 칭 |
재 료 |
구도.형식.형태 |
규 격 |
수 량 |
기타 특징 |
몸채 |
목조 |
홑치마.팔작지붕 |
정면8칸 측면1칸 |
1동 |
사랑채 안체 |
홑치마.맞배지붕 |
정면5칸 측면4칸 |
|
목조 |
홑치마.우진각지붕 |
정면5칸 측면1칸 |
1동 |
| |